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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역사

1. 그리스 아테네 및 로마시기의 금융

by heyu 2022. 5. 15.

1. 그리스 아테네 시기 금융업의 모태

그리스 아테네 문명은 서양 문명의 중심이 되는 문명으로서 이를 통해 금융의 핵심을 확인 해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는 부익부 빈익빈 말 그대로 양극화 현상을 고대에서부터도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일명 헥테모로이 라고 불리는 특정 계급은 원래는 자유민이나, 대부분의 경작한 농작물을 귀족에게 바침으로써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인데, 이런 구조의 문제점이 있었다. 바로 그것은 아테네를 떠받치고 있던 자유 시민들이 노예로 전락하여 국방력 및 경제가 흔들린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솔론의 개혁으로 민주주의로 나아가면서 금융이라는 새로운 형태를 접하게 되었다. 솔론은 헥테모로이의 부채를 탕감해줌으로써 중산층을 빚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대외적으로는 강력한 해군력으로 경쟁국인 스파르타와의 힘겨루기에서 우위를 차지한 아테네는 그리스의 핵심 세력이 되어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다. 이는 아테네의 상업,무역업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경제가 전반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기원전 431년경 발발한 펠로폰네소스전쟁으로 인하여 일생에 걸쳐 전사로 훈련받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은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자연스럽게 무역업에 타격을 받으면서 새로운 형태의 금융이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소위 대부업이었다.

대부분의 무역을 해상을 통해서 하는 이때는 엄청난 위험이 따랐으니 기상 악화에 따른 상선의 침몰이나 적군에 대한 약탈 위험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면서 각종 위험에 따른 이자를 책정해서 고리대금업을 수행해왔던 것이었다. 금융업의 발달은 많은 시민이 그들의 병역 의무를 저버리고 무역업을 하게 된 계기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돈의 맛을 본  시민들이 국방의 의무를 저버리자, 국방은 용병으로 대체되게 되었다. 국방력의 약화는 다른 나라의 침략에 취약함을 그대로 보여주었으며, 결국에는 그리스의 주도권을 스파르타에게 내어주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2. 로마 시대의 금융

로마 시대의 계급과 경제

로마 시민들은 기본적으로 전쟁으로 약탈하여 경제력을 취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시민들에게 있어서 전쟁이란 일확천금의 기회였으나 자칫 잘못하면 빚만 지닌 채 채권자에게 시달릴 수도 있는 양면성의 측면이 있었다. 경제력이 되는 시민들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시민은 창병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는데, 전쟁에서 최전방에서 가장 위험하지만 소득이 없는 위치였다. 빚을 얻어 전쟁에 참여 했으나, 소득이 없이 돌아온 이들은 그야말로 채권자의 빚 독촉에 시달려 노예나 다를 바 없었다. 이때 채무를 상환하지 못한 평민들을 노예로 삼지 못하는 법령을 그나에우스 세르빌리우스라는 집정관이 발포를 하게 된다. 이렇게 평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법안을 만들어지나 싶더니 한창 카르타고와 대립하던 기원전 4세기경에 법안을 폐지하여 평민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전쟁의 최전방에 서는 평민들이 꼭 필요했기에 이는 다시 12표법으로 제자리를 잡게 되었다. 채무를 진 평민을 노예로 삼지 못하게 하는 법령으로 로마 최초의 성문법으로서 정치의 법제와 근간이 되었다. 

제정의 등장과 인플레이션의 가속화

로마 시대의 경제는 이렇듯 침략과 약탈로서 충당하게 되었다. 이 역시 부자들은 더 부자로, 가난한 자들은 더욱더 가난하게 되었으며, 중산층이 몰락하게 되었다. 사회를 지탱하는 중산층의 몰락은 국가를 흔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혼돈의 시기에서 등장한 것이 강력한 통치권으로 이때 등장한 사람이 기원전 45년경 카이사르 , 그 뒤를 이어 옥타비아누스가 등장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엄자로서 본인을 칭하였으며, 화폐를 주조하였다. 화폐의 주조는 로마의 상업을 활성화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로마의 5대 황제인 네로는 폭군으로 알려진 황제로, 황제에 오르는 과정이 떳떳하지 못한 탓에 군대와 대적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네로는 군대 대신 평민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시장가격을 통제하는 고정물가제를 시행하였다. 하지만 이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또한 로마의 안정이라는 명목하에 온갖 축제를 일삼으며 평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였다. 대신 밖으로는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하여 폭동을 불러일으켰으며 결과적으로 AD 68년 발생한 대화재 및 폭동으로 황제 네로는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후 여러 황제를 거치면서 화폐가치가 상당히 저하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로 대규모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경제가 타락하기 시작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정책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가 된 이후 물가안정을 꾀하기 위하여 화폐개혁을 단행하였다. 이가 큰 효과를 보지 못하자,  301년 가격통제령을 발표하고 대부분의 물건과 용역의 상한을 정하고 어길시 큰 벌을 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물론 시장의 원리에 반하는 이런 행동들은 시장에서 부작용을 낳게 되었으며, 시장에서 물건이 없어지고 화폐가치는 더욱 추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세제개혁을 단행하는데, 불규칙적이었던 세금 징수를 1년에 한 번씩 일정하게, 납세자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균등하게 징수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납세자의 입장에서는 일정한 세금을 납부하는 것이 좋은 듯하면서도 당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징수하는 점은 매우 곤혹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재정정책으로 인해 로마의 전체적인 재정 효율성이 개선되었다고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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